홋카이도도립문서관 상설전시

주의
이 페이지는 구 홋카이도 정부 청사 (빨강 벽돌 청사) 내에 설치되어 있던 문서 관 상설 전시실 (2019 년 9 월말 폐쇄) 안내입니다.

홋카이도도립문서관 상설전시
문서로 보는 홋카이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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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각종 문서를 통해, 개척사 시대를 중심으로 한 홋카이도 근대화의 발걸음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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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근세 마츠마에 에조치의 생활 (개척 이전)
02. 〔모형〕초창기 삿포로
03. 개척사(開拓使)의 시대
04. 개척사(開拓使)의 탄생
05. 개척사의 사업과 고용된 외국인들
06. 사람들의 생활상
07. 교통과 통신
08. 이민자 정착시대
09. [전시코너] 아카렌가(구 도청)청사의 역사
10. [전시코너] 하코다테봉행소(箱館奉行所)와 그 문
11. 기록사료의 보전 (문서관의 업무)
 
이 자료의 외국어 표기는 삿포로(札幌) 대학교의 학생들의 협력으로 번역이 실시되었고, 삿포로 대학교의 감수(監修)를 받았습니다.
 

01. 근세 마츠마에 에조치의 생활 (개척 이전)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되기 이전, 근세의 홋카이도의 모습입니다. 당시, 홋카이도는 마츠마에 에조치(松前蝦夷地)라 불려졌으며, 일본본토로부터 이주가 활발하게 시작된 시기는 16~17세기경부터입니다. 홋카이도 남부에는, 봉건 영주의 성곽 마을로 마츠마에(松前)와 하코다테(箱館) 등 일본인 마을이 생겨졌고, 그 밖의 지역에는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 민족이 널리 퍼져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마츠우라 타케시로 작(松浦武四郎) 동서에조산천회도취조 도「東西蝦夷山川絵図取調図」18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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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인 마츠우라가 중앙정부인 바크후(幕府)의 명령으로 3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입니다. 경도·북도 각 1도 분을 한장으로 나타내어, 총 26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천과 촌락등, 내륙상황을 상세히 그려 넣은 것이 특징입니다. 홋카이도를잘 아는 마츠우라는, 그 후 개척사의 관리로 채용되어 마츠마에에조치(松前蝦夷地)를 홋카이도(北海道)로 개명하였습니다.

일본인의 축제와 아이누민족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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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마에에조치(松前蝦夷地)에서는 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어업과 수렵을 중심으로 한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02. 〔모형〕초창기 삿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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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형은, 1873년 당시의 삿포로시가지 모습을 복원한 것 입니다. 개척사는, 1869년 발족과 동시에, 벌판을 개간하여 삿포로를 홋카이도의 중심도시로 개발하였습니다. 지금의 오오도오리(大通)의 북쪽은 관용지, 남쪽은 주민거주지, 상가지역으로 계획적으로 개발되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해, 삿포로의 인구는 1,949명이었습니다.
(척도 1,200분의 1 동서·남북 약2.6km)

개척사삿포로본청사(開拓使札幌本庁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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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페인트로 도색한 서양식 목조건물로, 당시 미국 개척지에서 유행한 양식입니다. 개척사 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으나, 완공 후 불과 6년 만에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03. 개척사(開拓使)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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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근대는, 하코다테전쟁(箱館戦争)후에 설치된「개척사(開拓使)」[1869~82]시대로부터 시작됩니다. 메이지 유신정부(明治維新政府)는, 미개척지인 홋카이도를 일본의 다른 지역과 같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 많은 인재와 자금을 투자해 홋카이도의 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시대의 문서가, 홋카이도 도립문서관에 다량으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연구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하코다테전쟁 (箱館戦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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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메이지 신정부(明治新政府)에 저항하는 구바크후군(舊幕府軍)이 전투를 벌이며 북상(北上)하여, 홋카이도 남부를 무대로한 하코다테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홋카이도 남부지역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04. 개척사(開拓使)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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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홋카이도를 통치하는 관청으로서 개척사(開拓使)가설치되었습니다.
또, 그때까지「에조치(蝦夷地)」등으로 불려왔던 이 북방의 섬도「홋카이도(北海道)」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신정부는, 개척사에 강력한 권한과 예산을 주어, 삿포로에 도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상징으로, 서양식으로 개척사 삿포로본청사(開拓使札幌本庁舎)가 세워졌습니다.

개척사(開拓使)의 심 볼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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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는, 북쪽을 향해 항해하는 선박의 지표인 북극성을 심볼마크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청사에는 흰 바탕에 빨간 별이 그려진 깃발이, 선함에는 푸른 바탕에 빨간 별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이 심볼마크는, 개척사 이후에도 도민들에게 친숙하게 받아들여져, 현재에도 그 모양은 조금 바뀌었으나 홋카이도의 도장(道章)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05. 개척사의 사업과 고용된 외국인들

신정부는「개척사 10년계획」<1872~81> 을 세워, 본격적으로 홋카이도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개척사는 일본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민자를 받아들여, 산업을 일으키고, 새로운 사회와 문화 건설에 주력하였습니다. 개척사직영의 공장, 시험장, 탄광이 도내 각 지에서 개업하였습니다.

개척사제품의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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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의 관영공장에서는,연어통조림과 맥주 등, 여러가 지 제품을 생산하였고, 제품의 라벨은 개척사의 붉은 심 볼마 크가 사용되었습니다.

고용된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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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는, 해외의 신지식과 고도의 기술을 도입하기 위 해, 미국관료였던 케프론을 시작으로, 많은 외국인 인재 를 초 빙하였습니다.

 

06. 사람들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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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가 설치되었을 당시, 홋카이도의 인구는 약 10만명이었습니다.
개척과 함께 인구는 급증하여, 10년 후인 1879년에는 2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어업발전으로 인해, 개척지가 해안 부근과 삿포로 주변에 생성되어 동시에 도시도 발달하여 새로운 문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개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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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은, 메이지유신정부에 패하여, 활로를 홋카이도로 옮긴 무사들이었습니다. 당시 개척지 의 많은 부분은 아직도 연안부와 삿포로 주변 지역에 머 물고 있었습니다.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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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등 오래전부터 상품유통으로 발전한 하코다테와 같은 연안부의 도시에서는, 시민생활에 있어서도 새로운 문명개화의 영향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당시 각 도시에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의 직업을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아이누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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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개척이 진척되어 가자 ,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 민족은 토지를 빼앗기게 되어 가고 또한, 수렵과 어업에도 제한이 가해져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또, 1875년 러시아와 맺어진 사할린·치시마 (千島) 교환조약으로 인해, 사할린에 살던 아이누 민족이 삿포로 부근 촌락으로 강제이주되어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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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정부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교육제도를 정하였으나, 개척지인 홋카이도는, 다른 지역보다 몇 년 늦게 이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 이외의 개척지에서는, 취업연수가 짧은 기간의 간이한 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이러한 변칙적인 교육은, 그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어 홋카이도 교육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07. 교통과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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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 시대의 해양운수는 기선의 증가, 연안항로의 정기화, 운수회사의 창립으로 빠르게 근대화 되었습니다. 또한, 1873년에는 당시의 선진기술을 이용하여 하코다테와 삿포로를 연결하는 일본최초의 장거리도로가 완공되었으며, 전신선과 우편망도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통신의 넷트워크화가 촉진되었습니다.

철도의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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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내륙부에서 생산된 석탄의 운반수단으로 일찍부터 검토되어 1880년, 오타루와 삿포로 사이에 개통되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에 이어, 일본에서 3번째로 일찍 개통되었습니다.

08. 이민자 정착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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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개척사 10년계획」의 종료와 함께 개척사는 폐지되어, 개척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1886년에 홋카이도 도청이 설치되어, 개척사업전반에 걸친 재검토가 시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홋카이도는「개척지」에, 많은 사람들의 정착 이민을 장려하는「이민지」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구화도 (殖民地区画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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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도청은, 도내의 주요한 벌판을 각각 측량, 구획화를 실시하여 적극적으로 이민자를 모집하였습니다. 이러한 각 벌판의 구화도 (区画図)는, 이민자의 토지신청과 마을형성의 기초로서 크게 활용 되었습니다.

내륙으로의 이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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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개발지의 대규모 토지불하가 허가되자, 전국의 농촌에서 매년 수많은 이민자가 홋카이도를 찾았습니다. 개척지는 급속하게 홋카이도 동부지역, 북부지역으로 확장되어, 제1차세계대전기에 정점에 달했습니다.

09. [전시코너] 아카렌가(구 도청)청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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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렌가 청사에 대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아카렌가 청사는, 홋카이도 도청의 청사로서, 1888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비용을 들여 세워졌습니다. 지하1층, 지상2층의 미국식 신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아카렌가(붉은 벽돌)」라는 애칭으로 도민들에게 불려졌습니

아카렌가 청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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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렌가 청사의 설계는, 히라이 세이지로(平井晴二郎)를 중심으로 한 홋카이도 도청 토목과 건축기사들이 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렌가 청사의 특징인 팔각형 돔은, 구조상으로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준공으로부터 수년후 철거되었습니다.
팔각형 돔이 창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1968년의 일입니다.

아카렌가 청사의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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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월 11일, 아카렌가청사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의 사진입니다. 벽돌 외벽은 무사하였으나, 내부와 지붕은 피해가 심했습니다. 1910년부터 수리공사에 착수하여, 1912년 6월에 복원되었습니다.

복원된 아카렌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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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홋카이도 개척 100년을 기념하여, 아카렌가 청사를 창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메이지기의 양식 건축물은 얼마되지 않아 ,이듬해에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키카타마리 포장도로 (木塊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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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렌가 청사 정문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길은, 1924년에 삿포로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포장도로입니다.
약품처리 된 느티나무를 묻어 시공하였습니다.

10. [전시코너] 하코다테봉행소(箱館奉行所)와 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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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본 문서관이 소장한 하코다테봉행소(箱館奉行所)문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하코다테봉행소는, 하코다테 개항과 함께, 에도바크후(江戸幕府)가 1854년에 설치한 관청입니다. 당시의 임무는, 항구에서의 외교업무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홋카이도 전역을 관하하에 두게 됩니다. 개척이 진척됨에 따라, 아이누 민족정책과 북방경비업무를 맡는 중요한 기관이 되었습니다.

캇헤르의 구조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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캇헤르는 네덜란드어로 스토브입니다.
홋카이도 북부와 사할린에 취임한 관원을 위해, 하코다테봉행이 주물사에게 의뢰해 총 24개를 만들었습니다. 국산 제1호가 되는 스토브의 약도입니다.

문서로 보는 에도바크후(江戸幕府)말기의 하코다테와 에조치 (홋카이도의 옛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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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봉행소(箱館奉行所)의 문서로, 하코다테에서의 서양열강과의 교섭과 바크후의 아이누 민족정책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할린에서의 이민족과의 교역 등 당시의 활발한 국제적인 활동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문서에서는 하코다테봉행이 통역을 통해 영국과 미국인 영사에게, 시내에서 권총을 발포하지 않도록 강력히 요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방민족·사할린원주민과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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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원주민(길랴크,오로크족)은, 아물강 하류지역(러시아령)에 사는 민족으로, 상거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누 민족 또는 바크후(일본인)의 관원과 교역을 하기 위해, 사할린에서 건너왔습니다. 사할린 원주민은,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손에 넣은 비단, 청옥、독수리 꼬리털 등 진귀품을 지참했고, 한편 일본측은 철기나 모피 등을 제공하였습니다.

11. 기록사료의 보전

문서관의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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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있었던 일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증거가 되는 기록사료가 필요불가결합니다. 개척사문서 등 오래된 기록사료는 소중하게 보존함은 물론, 새로이 발견된 기록에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사료를 찾아내어, 후세에 전하는 것도 문서관의 사명입니다.
홋카이도 도립문서관은, 현재와 후세의 도민이 홋카이도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끔, 또한 도의 행정을 검증 할 수 있도록하기 위해, 홋카이도의 공문서를 중심으로 기록사료를 수집·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의 외국어 표기는 삿포로(札幌) 대학교의 학생들의 협력으로 번역이 실시되었고, 삿포로 대학교의 감수(監修)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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